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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BBC 방송

명작의 사생활 (The Private Life of a Masterpiece) [9부작]

 

다큐소개 : 위대한 예술 작품에는 각각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기에 이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명작의 사생활>은 9부에 걸쳐서 유명화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입니다.

 

명작의 사생활 1회 - 요하네스 베르메르

네덜란드 풍속화의 대가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의 작품 《회화 예술》은 《회화의 알레고리》, 《작업실의 화가》, 《화가의 아틀리에》등 다른 제목으로도 불린다. 그림 전면에 드리워진 무거운 휘장이 젖혀지면서 화가의 작업실이 드러나고 있는 이 작품은 베르메르가 그린 작품 중 가장 큰 그림이며, 그가 빚에 몰려 작품을 팔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 작품만은 죽을 때까지 보관하며 애착을 가졌다. 다양한 작품 제목만큼이나 이 작품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다. 우선 안쪽에 있는 여인을 살펴보면, 그녀는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오른손에는 트럼펫을, 왼손에는 노란색 책을 안고 있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과 학문을 담당하는 여신이 지녀야 할 상징물로 이 여인은 역사의 여신 클리오(Klio)임을 짐작할 수 있다. 탁자 위의 다양한 오브제들은 클리오의 자매인 뮤즈의 상징물로 회화와 건축, 조각을 의미한다. 한편, 여인이 머리에 쓰고 있는 월계관은 예로부터 명성이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며, 트럼펫은 그 명성이 세상에 널리 퍼지는 것을, 책은 그것이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진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뒤쪽의 지도는 그 명성이 네덜란드 17주에 울려 퍼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우의적으로 표현된 이 명성의 주인공은 등을 보이고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의 명성이 될 것이다. 이처럼 단지 '아틀리에에서 작업 중인 화가'를 주제로 그린 그림이지만 다양한 의미로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작품이 우의화이기 때문이다. 페르메이르는 자신의 주특기였던 실내 그림의 구도를 이용하여 회화의 우의성과 풍속화로서의 현실성을 융합하는 실험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그 특유의 빛과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찬 공간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의 조그만 아틀리에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명작의 사생활 2회 - 구스타프 클림트

전세계 예술 작품을 통틀어 가장 많이 복제되고 재생되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는 클림트가 자신의 유일한 반려자인 에밀리 플뢰게를 강렬하게 포옹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당시 비엔나의 시대상과 정서 그리고 성에 대한 사고를 잘 반영하고 있다. 당시 ‘프로이트’의 도시 비엔나에는 창녀들이 득시글댔고 그와는 반대로 성에 대한 사고는 보수 그 자체였다. 클림트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화가인 에곤 쉴레로부터 명성을 추월 당하기 전까지는 당시 비엔나 예술가들 중에서는 가장 엉뚱하고도 훌륭한 화가였다. 그는 전통적인 사고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성이나 여성의 나체 그림을 그렸었다. 는 그림의 디자인이나 의상에서 알 수 있듯이 성적인 욕망을 담은 그림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의 긴 의상은 직사각형 디자인의 모형들이 가득하고, 반대로 에밀리 플뢰게의 의상은 원형으로 디자인된 도형들이 가득하다. 엑스터시를 표현한 것인지 두려움을 표현한 것인지, 그녀의 손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듯하면서 경직되어 있으며, 발은 바위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어 보이면서도 바위 끝을 움켜쥔 형상이다. 그는 그녀를 제압하다시피 부둥켜 안고 있으며, 그녀는 무릎을 꿇고 있다. 최근 어떤 평론가들은 이 그림이 여자가 얼굴을 외면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하고, 실제로 남자의 힘에 저항하는 듯한 형체를 취하고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에도 수많은 인테리어 디자인이나 데코레이션, 패션, 보석 등 엄청난 활용 가치를 보장해 주는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명작의 사생활 3회 - 파울로 우첼로

<산로마노의 전투>는 거의 6백년 전에 피렌체에서 제작된 명화로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전쟁과 예술의 발전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그림이다. 총 3막으로 구성된 우첼로의 명화 <산로마노의 전투>는 1막당 1점씩 그려져 있으며 각기 다른 장소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1432년 6월 1일 피렌체로부터 30마일 떨어진 산로마노라는 작은 마을 근처에서 벌어진 시에나와 밀라노 연합군을 격파하는 피렌체 군대의 승전보를 그린 그림이다. 우첼로의 이 명화들은 아직까지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이 그림들은 입체파 혹은 입체주의의 상징으로 비유되어 왔으며, 우첼로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말들은 종종 피카소 그림의 그것들과 비교가 되기도 했다. 또한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창이나 작살 등은 훗날 잭슨 폴락의 에도 반영된 바 있다.


명작의 사생활 4회 -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은 아마도 전세계 명화를 통틀어 가장 대중화되고 반대로 가장 많은 연구가 있어온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일 것이다. 어떻게 제작이 되었으며, 또 어떻게 복원이 되었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들이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명화로,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모아놓고 이들 중 누가 자신을 배반할 것인지를 얘기하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데생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에서 발견되다시피 그는 예수의 제자들의 형상을 실존 인물들로 그렸으며,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델로 두 명의 인물을 썼다고 한다. 16세기 문헌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의 데생에 대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비계 앞에서 식사는 물론이고 물도 마시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곤 했고, 또 어떤 날은 서너번 붓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자신의 인생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했다고 전해진다. 1726년 최초 복원 이후에도 수많은 복원가들이 복원만 하는데도 손에 고통을 받을 정도였으니 레오나르도 본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덧칠 시에는 빵을 집는 제자 한 명의 손을 겨우 복원할 수 있었을 정도고 그 뒤로 많은 복원가들이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1954년 한 미술학자는 ‘위조나 복원을 넘어선 작업’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최근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불그스레한 초상화로 인해 다시 한번 <최후의 만찬>이 얘깃거리가 되고 있다


명작의 사생활 5회 - 살바도르 달리

<십자가에 매달린 성 요한의 그리스도>는 1950년대 초 살바도르 달리에 의해 탄생한 명화로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그린 명작이라 불리는 2점의 명화 중 하나이다. 살바도르 달리는 초현실주의 화가답게 항상 꿈을 형상화하는 작업을 해 왔었고, 진정한 예술가들만 꾼다는 백일몽에서 원자의 핵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보인 이른바 ‘Comic Dream’을 꾼 뒤 이에 영감을 받고 그린 그림이라 주장하고 있다. 꿈을 해몽하길 원 안에 존재하는 삼각형에 대해 얘기했었고, 여기서 시작한 그의 아이디어는 예수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고 그 모습은 역삼각형 구도를 하고 있는 독특하고 기하학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그림을 완성케 했다. “나는 삼각형과 원이 공존하는 기하학적인 구조를 도안해냈고 나의 미적인 과거 경험들을 모두 투여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 삼각형 안에 넣을 수 있었다.” 라고 말했다. 처음 이 그림이 전시가 되었을 때 많은 평론가들이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지만, 일부는 황홀하거나 기절할 정도로 엄청난 미적 쾌감을 얻었다고 술회했다. 현재 글라스코 아트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이 명화는 많은 이들에게 미적 쾌감을 선사해주고 있다고 한다.


명작의 사생활 6회 -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명화 <부활>은 종교를 주제로 한 명화 중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림을 보면 부활한 예수가 관에서 나와 엄숙한 표정으로 한쪽 다리를 관에 올린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예수는 분홍색 수의를 입은 채 오른손에는 붉은색 십자가 모양의 깃발을 들고 마치 개선장군인양 서 있는 모습이 죽음에서 부활한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모습이 예수의 어떤 이상적인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가슴 한 곳에 아직도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는 모습이나, 관 위에 올려놓은 왼발로 인해 아랫배에 주름이 잡힌 모습들이 그러한 증거이다. 또한 예수의 얼굴을 살펴보면 상당히 인상적이다. 눈은 퀭한 것이 잠을 자지 않은 모습이고 코는 약간 내려앉은 모습에 수염은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이다. 영국 작가 올더스 레너드 헉슬리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의 육체적, 지적인 강인함을 엿볼 수 있는 세계 최고의 작품이라 전해진다. 피에로는 잠든 병사들의 모습을 세세하게 표현했으며, 오른쪽 병사는 넘어질 듯한 모습에 각각의 병사들은 제각각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 역시 예수의 부활을 눈치채지 못한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한가지 놀라운 점은 세계 2차 대전 당시 이 그림이 보관되어 있던 산사풀크로 시는 연합군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명작의 사생활 7회 - 얀 반 에이크

얀 반 에이크는 네덜란드 화가로서 형인 휴베르트 반 에이크와 플랑드르 화파의 기초를 닦은 북부 유럽의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적인 화가이다.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유명한 르네상스 미술가는 피렌체공국의 브루넬레스키가 손꼽힌다. 얀 반 에이크는 유화를 발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그가 색체 가루(안료)를 최초로 기름에 섞어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화가들은 광물이나 식물등에서 색체를 발견하고 이를 가공하여 안료를 직접 마련하였으며 그것을 주로 계란에 섞어 사용하였다. 하지만 계란에 섞은 물감은 빨리 마르는 단점이 있어서 에이크 형제는 기름을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종래의 양식이나 구도(構圖)에 구애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자연을 관찰하여 현실 세계의 세세한 부분을 섬세하고 정교하게 표현하였으며, 냉엄하고 신비적인 분위기로 종교적 경건과 신앙을 표현하였다. 또 플랑드르에 초상화 장르를 확립하였는데, 새로운 시야와 기교는 후세 회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명작의 사생활 8회 - 피터 브뤼겔

피터 브뤼겔의‘베들레헴의 인구조사((Census at Bethlehem))’는 눈 내리는 겨울 풍경을 여느 그림보다 실감나게 표현했다. 브뤼겔은 서양 예술계에 '눈 내리는 풍경'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화려하고 사건 중심의 이탈리아 화풍에 반대하며, 사람 중심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베들레헴의 인구조사’는 성경 속에서 마리아와 요셉이 세금을 내러 가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지만, 막상 주요 사건과 인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평민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디테일하게 표현하고, 자연 풍경을 표현하는데 공을 들인다. 농민 브뤼겔이라 불리는 그의 작품 세계를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명작의 사생활 9회 - 폴 고갱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클로비 고갱은 《르 나시오날》이라는 신문의 정치부 기자였다. 1848년 2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 공화정이 되면서 프랑스는 정치적 혼란기를 겪게 된다. 클로비 고갱은 이때 페루의 수도인 리마로 이주해서 신문사를 차리기로 계획하고 가족을 데리고 페루로 이주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페루로 이주하는 동안에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폴 고갱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페루 리마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리마에서 보낸 시기는 1849~1854년까지 였으며 리마에서 생활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1854년 고갱의 가족은 프랑스로 돌아와 오를레앙에 정착하게 된다. 오를레앙은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의 가족은 가난하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렸다. 1865년 12월 고갱은 선박의 항로를 담당하는 견습 도선사(사관후보생)가 되어 상선(商船)을 타고 라틴아메리카와 북극 등 많은 곳을 여행하였다. 1871년 그가 인도에 있을 때 어머니 알린 고갱의 사망소식을 듣게 된다. 1872년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거래점의 점원이 되어 점원생활을 하였다. 그의 일자리는 어머니의 친구인 구스타브 아로자라는 여인이 마련해준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고갱의 <<신의 아들>>의 탄생과 비극적인 고갱의 인생, 훗날 이 그림이 인정받기까지 걸어온 가시밭길을 다루고 있다. 

 

::: 이 글은 SKYHD 홈페이지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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